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스크바 공방전 (문단 편집) == 결과와 의의 == 소련군은 독일의 진격을 막는데 성공했다. 방어전이 성공하면서 히틀러가 야심차게 추진한 [[바르바로사 작전]]은 제대로 물먹게 되었고 모스크바 공략에서만 40만에 달하는 피해를 봤다.[* 1941년 11월: 145,000명, 1941년 12월: 103,600명, 1942년 1월: 144,900명] 소련군은 방어전에서의 손실과 불필요한 반격 작전에서의 피해를 합쳐 대략 100만에 달하는 병력이 희생됐다.[* [[데이비드 글랜츠]]의 저서 '거인들의 전쟁(When Titans Clashed)'에 의하면 소련군은 방어 국면에서만 65만 8,279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1월 7일까지의 반격 국면에서 또다시 37만 955명의 손실을 냈다.] 그 외에 모스크바를 요새화하느라 시민들은 통행의 부자유, 거주지 상실 등의 피해를 봤다. 소련군은 1942년 봄에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안드레이 블라소프]]가 지휘하는 군단을, [[하르키우|하르코프]] 방면에서는 [[세묜 티모셴코]]가 지휘하는 군단을 내세워 각각 독일측을 공격했다가 패퇴하면서 오히려 방위망에 구멍을 내 버렸다. 특히 블라소프의 경우는 북부집단군 사령관 게오르크 폰 퀴힐러의 포위망에 제2충격군을 무리하게 몰아넣다가 아예 역습을 당해 병력이 증발하였다.[* 하지만 이건 블라소프의 실책이라고 보는 것이 무리인게 처음부터 제2충격군 사령관은 키릴 메레츠코프였고 그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레닌그라드 포위망을 뚫기 위해 진격했지만 후속 부대가 돌파구를 받쳐주지 않아 게오르크 폰 퀴힐러가 지휘하는 독일군에게 오히려 6월에 역포위되어 섬멸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즉 블라소프는 그런 상황에서 사령관이 되었고 이미 전멸 직전이던 당시 소련군의 상황을 고려하면 제아무리 블라소프라도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주코프는 모스크바 전투에서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중부집단군을 완전히 밀어내기 위해 르제프에 주둔한 9군을 4면에서 포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지휘 하에 제1차 르제프 전투가 시작된다. 그러나 소련군에게 여러 모로 유리했던 동계 전투였음에도 9군의 신임 사령관 발터 모델의 공세적 방어에 휘말려 오히려 소련군이 괴멸적 피해를 입으며 1943년 봄까지 주코프와 이반 코네프가 직접 지휘하는 소련군 주력 부대가 [[르제프 전투]]에서 말 그대로 갈려 버렸다. 모스크바 전투에서 대차게 물먹었던 히틀러는 소련의 반격을 격퇴하고 이후에도 연이은 승전에 다시 허파에 바람이라도 채웠는지, 이전보다 더더욱 대담한 [[청색 작전]]을 전개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이어지는 청색 작전은 독소전쟁의 최대 분수령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2년 뒤 독소간의 대규모 기갑전을 통해 주도권을 노린 [[쿠르스크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손실들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공방전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승장구하던 독일 육군에게 첫번째로 대규모 패배를 안긴 전투다.[* 독일군 최초의 대패는 [[영국 본토 항공전]]이지만 독일 육군이 참가한 전투가 아니다.] 소련은 모스크바를 끝끝내 사수하는 데 성공하면서 기사회생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투를 통해 소련군은 독일 육군도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면서 사기가 크게 고양되었다. 그 사기의 고양이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소련 수뇌부의 무리한 역습으로 이어지는 부작용을 낳았지만, 연전연패하던 소련군의 심리적인 붕괴를 막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 뿐만 아니라 독일은 수 많은 보병장비와 지원장비들을 손실했고 결국 [[전차]] 생산에 동원되어야하는 군수공장들이 보병장비와 동계장비 생산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독일군의 만성적인 전차 부족을 초래했다. 게다가 수십만의 숙련공들이 병력 공백을 메꾸기 위해 징집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략적인 면에서 독일의 손실은 결코 적은 편이 아니었다. 주코프는 후에 동부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가 어떤 전투였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자신은 쿠르스크 전투나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아닌 모스크바 공방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모스크바는 정치, 경제, 군사, 철도 등 어느 부문에서나 그 중요성이 큰 도시였고 특히 철도의 경우 모스크바가 함락되면 유럽 러시아의 모든 보급이 끝장날 지경이었다. 더욱이 모스크바 공방전은 질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도 독일군에 뒤져 절망적이었던 상황에서 거둔 승리였고 연전연패하던 소련군에게 자신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쿠르스크나 스탈린그라드 전투 못지 않으며, 1945년 5월 9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소련군의 승리로 이어지는 길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